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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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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347회 작성일 22-04-2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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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여성부)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부서가 아니다. 한국에서 여성부 탄생은 국제적 흐름에 발맞추려는 노력,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의지, 정치지도자의 호응이 맞아떨어진 결과이자 성과였다. 2001년 창립된 여성부는 이름만 3번 바뀌어 현 여성가족부에 이르렀다. 그 역사를 들여다보면, 윤석열 당선인 측이 2021년부터 제기한 폐지론과 개편론은 사실 새로울 게 없다. 그럼에도 여성가족부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오는 5월 10일 출범하는 새 정부는 여성가족부 역사에 어떤 공과를 추가할까.
 


■위원회 한계 넘어 여성부를 갖기까지

한국은 1975년 ‘유엔(국제연합) 세계 여성의 해’를 계기로 여성 정책, 여성 관련 기구의 필요성을 인지했고, 1983년 한국여성개발원을 세웠다. 더불어 국무총리실 산하에 여성정책심의위원회를 설치했다. 한국여성개발원은 여성 관련 연구, 교육, 국제협력, 홍보 등을 맡고 이를 정책으로 세우는 일을 여성정책심의위원회가 한다는 구상이었다. 1988년엔 제2정무장관실이 여성문제 전담기구로 등장했다. 제2정무장관실은 부서는 아니었기에 정책 권한상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 제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정부’가 제2정무장관실을 폐지하고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당초 김대중 대통령은 여성부 설치를 공약했으나, IMF 외환위기 극복이 당면 과제인 점을 고려해 우선 여성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장은 한국 최초 여성 헌법학자로 꼽히는 윤후정 전 이화학당 이사장(90·당시 이화여대 교수)이 맡았다. 여성특별위원회는 국무위원(장관)급 위원장, 민간위원, 6개 부처 차관으로 구성돼 주요 정책을 ‘조정’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위원회가 조정을 맡고, 법무부, 행정자치부, 교육부, 노동부 등에 여성정책담당관실을 둬 협력한다는 틀이었다. 여성특별위원회의 정책기조는 ‘여성정책 주류화’, 즉 다른 부처의 정책에도 성평등의 관점이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었고, 성평등의 사회적 실현을 목표로 내걸었다.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을 1999년 2월 제정(7월부터 시행)했다. 여성특별위원회의 주요 성과 중 하나다.

위원회 체제로는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여성특별위원장은 국무위원급으로 국무회의에 배석할 수 있고 의견도 낼 수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의결권이 없었다. 또한 정부 부처가 아니었기 때문에 법령안 제안도 불가능했다. 말 그대로 ‘상징적 기구’로만 그치기 쉬운 구조였다. 이에 2001년 1월 29일 여성부가 탄생했다. 1실·3국·1심의관·1공보관·3담당관·8과 총 102명 규모로, 18개 부처 중 가장 작은 ‘미니 부서’였다. 초대 장관은 한명숙이 맡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여성부 출범 1주년 기념식에서 “앞으로 국가발전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여성인력 활용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했다. <김대중 자서전>에 나오는 표현을 빌자면, “역설이지만 여성부는 ‘여성부가 없어지는 그날’을 위해 일하는 부서”였다.
 

경향신문

김대중 대통령이 2002년 1월 29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여성부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제공


■다시 도전에 마주하다

여성부 신설은 여성계를 포함한 시민사회의 성과였다. 당시 여성계는 반여성적 정책과 후보에 대한 낙선·낙천 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호주제 폐지 움직임도 1990년대 이미 이어지고 있었다. 김영미 상명대 교수는 2001년 한국행정학회에 투고한 글에서 “우선 여성부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집단은 단연 여성단체일 것이다. (중략) 의회 과정을 거치는 동안 여야 어느 쪽의 공방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했다. 즉 여성부 창립은 ‘여성부를 만들면 남성 표가 떨어질 것’이란 우려보다 ‘여성부를 만들지 않으면 여성 표가 떨어질 것’이란 압박이 더 컸던 결과다.

이후 ‘참여정부’에 들어 노무현 대통령은 여성부를 여성가족부로 확대·개편했다. 복지부의 가족정책을 이관했다. 뒤이은 이명박 정부는 시작부터 ‘작은 정부’를 표방했고 통일부와 여성부 폐지를 추진했다. 정치권에서 여성가족부 해체론이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란 의미다. 해체까지 하진 못했다. 2008년 가족 및 보육정책을 다시 복지부로 넘기는 바람에 여성가족부는 여성부로 쪼그라들었다. 2년 뒤에는 복지부의 청소년·가족 기능을 다시 이관해 여성가족부로 확대한 형태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시작부터 함께했던 교육부(1948년 문교부), 농림축산식품부(1948년 농림부) 등에 비하면 여성가족부는 새천년에야 등장한 ‘젊은’ 부서다. 그 짧은 역사에 비해 덧씌워진 오해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여성부가 특정 과자 판매를 금지했다’, ‘전 세계에 여성부가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등이다. 여성가족부는 2021년 7월 ‘여성가족부에 대한 오해, 사실은 이렇습니다’란 팩트체크 자료를 배포해 이 같은 루머를 반박하고 나섰다.

뼈아픈 실책도 있었다. 이정옥 전 장관이 2020년 11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박원순·오거돈 사건은 권력형 성범죄인가”란 질의에 “국민 전체가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집단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답한 게 한 예다. 박원순 성폭력 폭로자를 뒤늦게 ‘피해자’로 언급한 것을 포함해 피해자 보호에 앞장서야 할 기관으로서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질곡의 역사를 돌고 돌아 여성가족부는 다시 정치판에 불려나왔다. 윤석열 당선인이 후보 시절 ‘여성가족부 폐지’란 단 일곱 글자로 해묵은 논제에 불을 댕겼다. 최근엔 김현숙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박근혜 정부 고용복지수석)를 여성가족부 장관에 내정해 “해체 로드맵을 짜라”는 임무를 맡겼다. 여성계는 공약 단계에서부터 우려를 표명했고, 집회를 비롯해 폐지 철회 요구를 이어나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도 ‘해체 반대’ 입장이다. 과거 여성부를 만들었던 힘이 이젠 여성가족부 폐지를 막을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윤석열 정부에서 결론이 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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