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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국 아내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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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201회 작성일 23-01-0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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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1975년 6월 20일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할 수 없는 짓'이라며 국내 언론들이 개탄을 금치 못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부터 불과 10년 전 일어난 춘천호 여인 토막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된 토막살인 범죄는 시간이 흐를수록 수법이 더욱 잔인해졌고, 이후 모방범죄자들은 범죄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있다는 망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수법은 점점 더 엽기적이었고 범행의 결정적 증거인 사체의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게끔 훼손하거나 없애는 수법도 갈수록 교묘하고 치밀해졌다. 이팔국 아내 살인 사건도 그런 면에서 모방범죄의 잔혹성으론 종결판이라 부를 만한데, 이 사건은 단순히 사체를 토막만 낸 것을 넘어서 몸 전체를 완전분해한 잔학한 범죄다. 쉽게 말해서 수법에 있어서는 수원 토막 살인 사건의 오원춘고토 맨션 행방불명 살인 사건의 호시지마 타카노리보다 수십 년 먼저 저질렀다. 

2. 사건 정황[편집]

사건의 범인 이팔국(사건 당시 47세)은 1928년 경상북도 영천군 신녕면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처럼 자라오다가 1958년에 전처와 결혼하여 4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1969년에 전처가 사망한 후 무직으로 있으면서 식모 강간사기 행각, 포악한 성격으로 인한 폭력 행위 등으로 얼룩진 엉망진창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미 주위 사람들에게 변태성욕자로 알려진 이팔국은 1972년에 자택 가정부를 성폭행해서 형사 입건되어 처벌받은 전과가 있었으며, 이후에도 두 차례나 가정부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평소 사기성이 많아 일정한 직업도 없이 허가업무 등의 알선을 해주는 등 늘 그늘 속에서 살아오다가 1973년 9월에 다방을 경영하던 후처 이숙자(사건 당시 43세)를 만나 내연의 관계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부인 이숙자는 7년 전에 전 남편과 합의이혼을 했었다. 당시 이팔국이 실직 상태로 범행 때까지 놀고 있어 부인이 다방 등을 경영하면서 이팔국의 전처 소생인 4남매 등 6식구의 살림을 도맡아왔다.

이팔국은 실직으로 생활 능력을 잃게 되자 다방과 양장점을 운영하는 아내 이숙자에게 의존하여 얹혀 살고 있었다. 실직 후 별 하는 일도 없이 빈둥대기만 하는 남편 때문에 아내 이숙자는 남편과 다투는 날이 많아졌으며, 이팔국은 이숙자의 재산을 노리기 위해 아내의 동의도 없이 몰래 혼인신고까지 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참다못한 이숙자가 끝내 이혼을 요구하자 이팔국은 부부싸움 끝에 순간적인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고 끝내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손등에 피해자인 아내에 의해 할퀸 상처가 남았다.

그 다음 자신의 범행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다음 날 새벽 1시부터 6시까지 밤새도록 5시간에 걸쳐 끔찍한 행각을 벌였다. 그는 아내의 사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가 자택 목욕탕으로 옮겨 피부 조각을 머리카락과 함께 태운 다음 살점은 수십 조각으로 토막내어 하수구에 버렸고, 양이 너무 많은 나머지 근육 등을 비롯한 살덩이 등 미처 처분하지 못한 것들은 난도질한 다음 김치와 함께 항아리에 묻었다. 또 눈알과 내장은 잘게 다져서 하수구로 흘러 내려가도록 했고, 두개골과 뼈는 토막을 낸 다음 다시 아령으로 완전히 가루로 만든 뒤 연탄재와 섞어 하수구에 흘려보내는 등 완전히 사체를 해체하는 인면수심의 행각을 저질렀다.

날이 밝아오자 이팔국은 온 집에 소독약을 뿌려 탄내를 없앴으며, 자고 있던 전처 소생의 아이들에게 "누가 물으면 엄마는 20일 새벽에 집을 나간 뒤 일절 소식이 없다고 하라"라고 입막음까지 시켰다. 오전 중에 집안 소독을 완전히 끝낸 다음 그날 밤에는 연탄재에 섞은 뼛가루를 비닐봉지에 담고 시멘트 부대로 싸 집에서 1km 가량 떨어진 페인트 상회 옆 한 쓰레기하치장에 갖다 버렸다.[1] 이어 다음 날 새벽에도 김칫독에 묻어둔 근육 토막을 버킷에 담아 성균관대학교 옆 동네 쓰레기장에 내다버린 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태연히 산책도 하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그 뒤 무참히 토막살해를 당한 이숙자의 딸이 어머니가 사흘째 운영하던 의상실에 모습을 보이지 않자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으며, 딸은 특히 성격이 포악하고 걸핏하면 어머니에게 주먹질을 일삼는 의붓아버지가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귀띔을 했다. 실종 신고가 접수되어 수사가 막 시작될 무렵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한 동네 골목에서 환경 미화원이 쓰레기 봉투를 수거하다가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를 발견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 측은 국과수에 뼈 조직 부검을 의뢰했고, 부검 결과 훼손된 사체는 톱으로 잘려진 사람의 뼈로 밝혀졌으며, 부인의 실종 신고가 접수된지 6일째라 경찰은 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해 전처 소생 및 의붓자식들까지 모두 소환시켜 대질심문을 벌였다.

아이들은 역시 "20일 새벽 둘이 싸우다 조용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역겨운 냄새가 났는데 아버지가 '벌레가 끓어 그런다'며 소독을 했다"고 증언했다. 한 아이는 "뭔가 태운 냄새와 정육점에서 나는 냄새가 섞여서 났다"고도 했다.[2] 그 뒤 무참히 토막당한 뼈의 조직이 결국 피해자 이숙자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경찰은 피해자와 원한 관계에 있던 사람을 위주로 수사망을 좁히다가 사건 발생 10일만에 그를 검거했다.[3]

검거 1주일 뒤 현장 검증이 이루어졌을 때, 통행금지가 있었을 때인데도 주민들 50여명이 몰려 범행 재연을 지켜보면서 "저놈 죽여라"라고 외치는 등 치를 떨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특별한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으면서 목을 조르는 순간부터 시체 분해까지의 과정을 냉정하게 재연했다.

3. 재판[편집]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 8부 심훈종 재판장은 1심에서 살인 및 사체모독죄를 적용해서 이팔국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범행은 우발적 살인이었지만 뒤처리가 매우 극악무도했다는 게 이유이며, 재판부는 판결 당시 "피고인의 범행 행위는 우발적이었지만 그 뒷과정에서 사체를 훼손하는 등 지극히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인명을 천시하여 피고인의 행위는 용서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당시 이팔국의 변호인측은 범행 당시 그가 기억상실 등의 심신상실 상태하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이팔국 자신이 6.25 때의 부상으로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정신감정을 요청했으나 이마저도 기각되었다. 이에 이팔국은 판결에 불복해서 항소 및 상고를 했지만 2심과 3심에서도 기각당했으며, 사형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결국 사건 발생 2년 6개월이 지난 1977년 11월에 이팔국은 처형되었다. 범행이 워낙 잔혹했던데다 이팔국이 형장에서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범행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인간 말종이었기에 그가 사형당했을때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그가 사형을 당한 뒤에도 1970년대 중후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과 유사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 사건과 비슷한 사례로는 대한민국 외의 사건으로 13년 뒤인 1988년 홍콩에 있었던 콘힐 남편 살인사건이 있으며,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다. 범행 동기와 방법조차도 비슷했지만[4] 이쪽은 지인들에게 식사로 대접하기까지 했다. #[5] 사형이 집행된 이팔국과는 달리 이 사건의 범인은 형이 집행되지 않았지만 같은 해에 무기한 치료감호 처분을 받고 수감되었다가 1995년에 석방되었다.[6] 이는 5년 후 영화 '팽부(烹夫)'의 모티브가 되었다.[7]

이 사건은 향후 2004년에 법정 드라마 실화극장 죄와 벌 86회에서도 다루었으며 여기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비롯한 인물들이 모두 가명으로 처리되어 방영되었다. 범인 이팔국은 양병국, 피해자 이숙자는 이영미라는 가명으로 바꾸어 재연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범인 이팔국을 연기한 배우는 드라마 주몽에서 도치 역을 맡았던 이원재며, 피해자 이숙자를 연기한 배우는 지난 34회에서 다루었던 김선자 연쇄 독살사건의 범인 김선자 역과,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의 외숙모 역을 맡았던 이현실이다.

4. 이모저모[편집]

  • 이 사건이 일어났던 1970년대 당시에는 컴퓨터와 문서 파일을 사용하는 현재와 달리 타자기 정도밖에는 타이핑 수단이 없어서 보통 으로 진술조서를 받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팔국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살해 이유와 잔혹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너무나도 부족한 사체 처리 과정을 받아적던 사건 담당 형사는 그 인간이기를 포기한 행위에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무는 등 몸서리를 치면서 줄담배를 피우고 펜을 내동댕이쳤다는 일화가 있다.
  • 이팔국은 무척 잔인무도한 범행을 저지른 것과 대비되는 대학원 졸업자였다.[8][9][10] 피해자와 재혼하기 전에 서울과 동두천 등을 오가며 시장에서 푸줏간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칼 솜씨도 능숙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시체를 토막낼 때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데다 한 아이가 정육점에서 나는 냄새가 섞여서 났다고 한 증언도 이것때문이었다.[11] 또한 합기도, 유도, 태권도를 합쳐 무술 12단 경력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키 180cm의 장신으로 꽤나 건장하고 우람했던 체격이었던지라 사형 집행 후 그의 시체를 보관했던 관이 옆으로 터졌다는 일화도 있다.
  • 조갑제의 저서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에 기록된 이팔국은 2차대전 때 그 악명 높았던 남방전선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왔고, 6.25 전쟁에 참전해 훈장을 받은 바 있다고 한다. 이때 얻은 부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정신착란증이 있었고 기억이 오락가락 하기도 했다고 한다.[12] 사건 진술시에도 부인을 밀쳐 넘어뜨려 숨을 쉬지 않자 인공호흡을 하거나 입에 물을 떠넣기도 했으나 이내 사망했고, 그때 이팔국 본인도 실신해 이후 상황은 전혀 기억에 없고 정신이 드니 부인의 사체는 없어져서 더더욱 당황해 자수했다고 진술했는데, 조서에는 인공호흡이나 물을 떠넣는 행위가 목을 조르는 것으로 묘사돼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한 같은 저서에서, 이팔국이 고학력으로 놀고 먹는 백수인 듯 알려져 있으나 군납업으로 모은 돈이 꽤 있었다고도 한다. 상식적으로 자신만의 사업체를 두 개(다방과 양품점)나 경영하는, 세상 물정에 빠삭한 여성이 아무것도 없이 4남매만 거느린 이팔국을 일방적으로 먹여살린다는 건 좀 의심스럽기도 하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수사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따라붙던 것이 고문임을 상기하면 싹 무시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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