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비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623회 작성일 23-03-20 17:01본문
1. 개요[편집]
2. 설명[편집]
여기서 먼저, 피해자를 비난하는 행위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여행을 갈 때 집 문을 열어두고 현관에 금품을 놔두고 갔다 하더라도 그 금품은 주인의 것이고 이를 가져가는 이는 절도죄로써 죄를 지은 것이다. 하지만 집주인의 과실도 없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집 문을 열어놓고 금품을 잘 보이는 곳에 보관하는 행위와 절도의 타겟이 될 가능성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존재하며 집주인은 문을 닫고 잠그고 가는 간단한 행위로 절도의 타겟이 될 확률을 극적으로 낮출 능력이 있었음에도 이를 하지 않았고 이는 분명히 불필요하게 악인들을 끌어들이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왜 피해자 비난이 계속 욕을 먹는가? 비판받아야 마땅한 피해자 비난 유형은 아래 중 하나 이상이다.
1. 그냥 사실이 아닌 경우. 사실 가장 많은 경우이다. 비난받는 행위와 그 행위의 "위험성" 사이에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예를 들면 옳지 않은 피해자 비난중 가장 유명한 "강간 피해자의 옷차림 비난"이 있겠다. 강간범들은 누가 약해 보이는가를 중점으로 피해자를 고르지 옷차림이나 외모를 기준으로 고르지 않는다. 따라서 강간 피해자의 옷차림을 걸고 넘어지는것은 도덕이 어쩌고 하기 전에 그냥 과학적으로 틀린 것이다.
2. 범죄자를 옹호하는 경우. 위의 예에서 분명 집 문을 열고 여행간 집주인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둑이 잘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집 문이 열려 있었더라도 내 것이 아닌 것은 내 것이 아닌 것이며 이를 훔친 사람은 훔친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산 도둑과 똑같이 악한 것이다. 여기서 집주인의 부주의함이 부적절했을 순 있어도 도둑을 옹호하기 시작하면 틀린 것이다. 참고로 여기 "옹호"에는 "원래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뻔히 보이는 금품의 유혹에 넘어갔다" 등도 포함된다. 원래 좋은 사람들은 그딴 유혹에 안 넘어간다.
3. 비난이 도를 넘은 경우. 집주인이 "부주의했"을 수는 있어도 그 금품이 자기 것이었다는 전제 하에[1] 도덕적으로 그른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그냥 자기 과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어디 가서 투덜거리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여기서 집주인을 더 욕하는 것은 비난도 뭣도 아닌 그냥 생판 남을 욕하는 것이다.
4. 피해자가 자신이 하는 행위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달리 회피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때. 범죄자와 알콜중독자들이 넘쳐나는 위험 골목을 지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지만 그 골목을 지나지 않으면 30분쯤 돌아가야 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위험을 감수하고 그냥 들어갈 것이다. 따라서 이러다가 강도를 당했을 때도 피해자의 부주의함을 탓할 게 못 된다.
5. 피해자는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지?. 보통 범죄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로부터 회피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가해자에게 저항하지 않는 피해자를 비난한다. 이는 피해자가 재빨리 도주하거나 저항을 했다면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관점으로 보인다.
먼저 언급할 만한 사례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면서 사실은 저쪽이 진짜로 가해자이고 자신이야말로 억울하게 몰린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를 경쟁적 피해의식(competitive victimhood)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왜 피해자 비난이 계속 욕을 먹는가? 비판받아야 마땅한 피해자 비난 유형은 아래 중 하나 이상이다.
1. 그냥 사실이 아닌 경우. 사실 가장 많은 경우이다. 비난받는 행위와 그 행위의 "위험성" 사이에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예를 들면 옳지 않은 피해자 비난중 가장 유명한 "강간 피해자의 옷차림 비난"이 있겠다. 강간범들은 누가 약해 보이는가를 중점으로 피해자를 고르지 옷차림이나 외모를 기준으로 고르지 않는다. 따라서 강간 피해자의 옷차림을 걸고 넘어지는것은 도덕이 어쩌고 하기 전에 그냥 과학적으로 틀린 것이다.
2. 범죄자를 옹호하는 경우. 위의 예에서 분명 집 문을 열고 여행간 집주인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둑이 잘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집 문이 열려 있었더라도 내 것이 아닌 것은 내 것이 아닌 것이며 이를 훔친 사람은 훔친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산 도둑과 똑같이 악한 것이다. 여기서 집주인의 부주의함이 부적절했을 순 있어도 도둑을 옹호하기 시작하면 틀린 것이다. 참고로 여기 "옹호"에는 "원래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뻔히 보이는 금품의 유혹에 넘어갔다" 등도 포함된다. 원래 좋은 사람들은 그딴 유혹에 안 넘어간다.
3. 비난이 도를 넘은 경우. 집주인이 "부주의했"을 수는 있어도 그 금품이 자기 것이었다는 전제 하에[1] 도덕적으로 그른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그냥 자기 과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어디 가서 투덜거리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여기서 집주인을 더 욕하는 것은 비난도 뭣도 아닌 그냥 생판 남을 욕하는 것이다.
4. 피해자가 자신이 하는 행위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달리 회피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때. 범죄자와 알콜중독자들이 넘쳐나는 위험 골목을 지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지만 그 골목을 지나지 않으면 30분쯤 돌아가야 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위험을 감수하고 그냥 들어갈 것이다. 따라서 이러다가 강도를 당했을 때도 피해자의 부주의함을 탓할 게 못 된다.
5. 피해자는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지?. 보통 범죄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로부터 회피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가해자에게 저항하지 않는 피해자를 비난한다. 이는 피해자가 재빨리 도주하거나 저항을 했다면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관점으로 보인다.
먼저 언급할 만한 사례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면서 사실은 저쪽이 진짜로 가해자이고 자신이야말로 억울하게 몰린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를 경쟁적 피해의식(competitive victimhood)이라고 부른다.
심리학자들은 피해자로서의 지위가 사회적 및 공적인 심리적 지지를 얻을 수 있고, 당사자의 내면에서 도덕적 정체성에 우월감을 주는 반면, 가해자로서의 지위는 당사자의 내면에서 도덕적 정체성을 위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피해자 지위는 양측 모두에게 선망받는 지위라고 분석하고 있다. 호주 백인들의 이주자 혐오를 주제로 하는 어떤 연구에 따르면[2] 다수 집단은 소수 집단의 피해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 또한 소수 집단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고 항의할 수 있다. 즉, 이들은 100% 순수한 피해자란 없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자라고 믿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심리적으로 가해와 피해는 제로섬 관계로 인식되지 않는다고 한다.
객관적 우열이나 억울함과는 별개로, 경쟁적 피해의식은 갈등 상황을 완화하거나 건설적으로 개선하기는 커녕 도리어 악화시킨다는 점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대중적 의미에서의 피해자 행세(victim playing)라는 단어와도 연결된다. 이와 관련하여 학계에 리뷰 논문도 나와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것.[3]
다음으로, 사건과 무관한 제3자가 가해자 편을 들면서 피해자를 비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주제의 연구는 사회학, 사회심리학, 범죄학, 법학, 경찰행정학, 여성학, 문화비평 등의 분야들에서 폭넓게 이루어졌으며, 거의 사실상 강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경향을 핵심 토픽으로 하여 진행되어 왔다. 사건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조차 피해자를 비난하게 되기 때문에, 피해자는 이러한 비난을 받고 사회에서 고립되며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심해질 경우, 피해자는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을 밝히기 이전에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의 시나리오를 우려하여 아예 말을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결과적으로 성범죄 신고율은 범죄율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백과사전의 한 단락에서 피해자 비난을 설명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것.[4]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사회적으로 피해자를 무력화시키고 탈권력화(disempowerment)한다는 점은, 특히나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피해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된다. 국가와 정부, 법에 호소해보려고 해도 사법기관이 피해자를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본다면 정의의 구현은 어려워지게 되고, 주변 지인들이 또한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재활을 하는 것 역시 힘들어진다. 아무도 피해자 편을 들어주지 않으니,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로부터 벗어나서 사회에 재복귀하는 데 실패하게 되어, 끝없이 자신의 피해자성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따라서 피해자에 대한 구제와 지원은 피해자로부터 피해자성을 분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예컨대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그 피해자의 섹슈얼리티에서 피해자라는 라벨링을 떼어 줄 필요가 있다.[5]
범죄 피해를 공론화하는 것이 피해자 비난으로 인해 힘들어지기는 하지만, 때로는 정반대로 피해자 보호가 너무 극심해져서 거꾸로 무고죄가 발생하게 되기도 한다. 이쯤에서, 이 가능성은 페미니스트인 수전 브라운밀러(S.Brownmiller)가 자신의 저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에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엮어 이야기하면서 제기했다는 것을 미리 언급해야 할 것 같다.[6]
브라운밀러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백인 여성은 백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면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말을 꺼내지 못하지만, 흑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거나 강간 위협을 받으면 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공론화한다는 것이다. 백인 여성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흑인 남성과 성적으로 접촉한 뒤 강간이라고 주장하면 "우리 귀한 백인이 저 짐승 같은 흑인에게!"라는 여론이 형성되어서 피해자 보호가 이루어지지만, 성적 접촉 후에 강간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여자가 이렇게나 문란해서야, 쯧쯧!" 하는 여론이 형성되어서 거꾸로 백인 여성을 비난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인종차별이 갖는 사회적 영향과 관련하여 미국 사회에 상당히 의미심장한 통찰을 준다. 세상 일이 이분법적으로 볼 정도로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인 틀에 의해 규정됨을 보여주는 예이다.
인종차별, 지역 비하 등 특정 집단 전체를 비하하는 언행도 결과적으로 보면 피해자 비난이 될 수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데 많은 누리꾼들은 이걸 간과하고, 일단 사건사고가 생기면 해당 집단을 비하하기에 급급하다. 이 경우는 진짜로 가해자의 소행에 분노한다기보다는, 평소 안 좋게 생각했던 집단에 대한 깔 거리가 생겼다고 소스로 사용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여 그 집단에 소속된 피해자도 덩달아 비난을 듣게 되는 것이다.
사실 성폭력이나 다른 폭력 이상으로 피해자 비난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폭력이 있는데, 바로 학교폭력이다. 물리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 따돌림 등을 막론하고, 학교폭력의 경우 많은 가해자는 그 일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제3자들도 딱히 경멸하지 않는다. 적어도 피해자에 대한 경멸의 감정에 비하면 없는 수준에 가깝고, 오히려 뒤틀린 숭배의 감정이 깔려 있기도 하다. 학교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비하는 일상적이며, 다른 분야의 폭력에 민감하다는 사람들조차 그러한 비하는 별로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격한 언쟁 시에 사용한다. 이러한 비하의 어휘는 학교폭력과 전혀 관계없는 다른 논쟁(이를테면 젠더, 지역 논쟁 등)에서도 주된 비하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찐따, 담당일진, 아싸(가볍게 사용될 때도 있다), 왕따, '친구가 없다' 등등의 표현이 그러한 표현의 예이다. 위의 첫번째 문단에서는 선망받는 피해자 지위에 대해 논했다면, 여기서는 선망받는 가해자 지위와 연관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가해자들은 지금은 "아~ 나 이제 옛날처럼 거칠게 안 살 거야. 이제 착하게 살고 힘을 함부로 쓰지 않겠어." 같은 말을 하면서 여전히 가오를 부릴 수 있으며, 그들을 동경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은 유튜브 등에만 해도 넘쳐난다. 그들에 대한 비판자들에 대해서는 "너 저 사람 앞에서 무서워서 말도 못할 거지?" 같은 약자멸시의 어휘를 통해 어떻게든 끌어내리려는 공격들이 가해진다. 그 공격자들은 가해자들 앞에서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다. 이는 강약약강에 해당된다고 볼 수있다. 만만한 사람들에게는 막말을 쉽게 내뱉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상에서 (특히 젊은 세대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비하어 중 하나가 '찐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약자 멸시 및 비굴함이 학교폭력 문제를 피해자 비난으로 만드는 데 어떻게 기여하고 있느냐를 관찰할 수 있다.
한편 이 피해자 비난이란 개념이 악용되기도 한다. 2차 가해 문서에 나오는 것처럼, 피해자라고 자칭하는 자, 특히 무고자가 자신에 대한 반박과 비판을 피해자 비난이란 2차 가해라고 치부하고 반박을 봉쇄하는 것. 자세한 내용은 2차 가해 문서 참고.
다음으로, 사건과 무관한 제3자가 가해자 편을 들면서 피해자를 비난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주제의 연구는 사회학, 사회심리학, 범죄학, 법학, 경찰행정학, 여성학, 문화비평 등의 분야들에서 폭넓게 이루어졌으며, 거의 사실상 강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경향을 핵심 토픽으로 하여 진행되어 왔다. 사건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조차 피해자를 비난하게 되기 때문에, 피해자는 이러한 비난을 받고 사회에서 고립되며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심해질 경우, 피해자는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을 밝히기 이전에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의 시나리오를 우려하여 아예 말을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결과적으로 성범죄 신고율은 범죄율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백과사전의 한 단락에서 피해자 비난을 설명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것.[4]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사회적으로 피해자를 무력화시키고 탈권력화(disempowerment)한다는 점은, 특히나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피해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된다. 국가와 정부, 법에 호소해보려고 해도 사법기관이 피해자를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본다면 정의의 구현은 어려워지게 되고, 주변 지인들이 또한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재활을 하는 것 역시 힘들어진다. 아무도 피해자 편을 들어주지 않으니,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로부터 벗어나서 사회에 재복귀하는 데 실패하게 되어, 끝없이 자신의 피해자성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따라서 피해자에 대한 구제와 지원은 피해자로부터 피해자성을 분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예컨대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그 피해자의 섹슈얼리티에서 피해자라는 라벨링을 떼어 줄 필요가 있다.[5]
범죄 피해를 공론화하는 것이 피해자 비난으로 인해 힘들어지기는 하지만, 때로는 정반대로 피해자 보호가 너무 극심해져서 거꾸로 무고죄가 발생하게 되기도 한다. 이쯤에서, 이 가능성은 페미니스트인 수전 브라운밀러(S.Brownmiller)가 자신의 저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에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엮어 이야기하면서 제기했다는 것을 미리 언급해야 할 것 같다.[6]
브라운밀러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백인 여성은 백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면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말을 꺼내지 못하지만, 흑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거나 강간 위협을 받으면 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공론화한다는 것이다. 백인 여성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흑인 남성과 성적으로 접촉한 뒤 강간이라고 주장하면 "우리 귀한 백인이 저 짐승 같은 흑인에게!"라는 여론이 형성되어서 피해자 보호가 이루어지지만, 성적 접촉 후에 강간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여자가 이렇게나 문란해서야, 쯧쯧!" 하는 여론이 형성되어서 거꾸로 백인 여성을 비난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인종차별이 갖는 사회적 영향과 관련하여 미국 사회에 상당히 의미심장한 통찰을 준다. 세상 일이 이분법적으로 볼 정도로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인 틀에 의해 규정됨을 보여주는 예이다.
인종차별, 지역 비하 등 특정 집단 전체를 비하하는 언행도 결과적으로 보면 피해자 비난이 될 수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데 많은 누리꾼들은 이걸 간과하고, 일단 사건사고가 생기면 해당 집단을 비하하기에 급급하다. 이 경우는 진짜로 가해자의 소행에 분노한다기보다는, 평소 안 좋게 생각했던 집단에 대한 깔 거리가 생겼다고 소스로 사용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여 그 집단에 소속된 피해자도 덩달아 비난을 듣게 되는 것이다.
사실 성폭력이나 다른 폭력 이상으로 피해자 비난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폭력이 있는데, 바로 학교폭력이다. 물리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 따돌림 등을 막론하고, 학교폭력의 경우 많은 가해자는 그 일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제3자들도 딱히 경멸하지 않는다. 적어도 피해자에 대한 경멸의 감정에 비하면 없는 수준에 가깝고, 오히려 뒤틀린 숭배의 감정이 깔려 있기도 하다. 학교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비하는 일상적이며, 다른 분야의 폭력에 민감하다는 사람들조차 그러한 비하는 별로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격한 언쟁 시에 사용한다. 이러한 비하의 어휘는 학교폭력과 전혀 관계없는 다른 논쟁(이를테면 젠더, 지역 논쟁 등)에서도 주된 비하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찐따, 담당일진, 아싸(가볍게 사용될 때도 있다), 왕따, '친구가 없다' 등등의 표현이 그러한 표현의 예이다. 위의 첫번째 문단에서는 선망받는 피해자 지위에 대해 논했다면, 여기서는 선망받는 가해자 지위와 연관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가해자들은 지금은 "아~ 나 이제 옛날처럼 거칠게 안 살 거야. 이제 착하게 살고 힘을 함부로 쓰지 않겠어." 같은 말을 하면서 여전히 가오를 부릴 수 있으며, 그들을 동경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은 유튜브 등에만 해도 넘쳐난다. 그들에 대한 비판자들에 대해서는 "너 저 사람 앞에서 무서워서 말도 못할 거지?" 같은 약자멸시의 어휘를 통해 어떻게든 끌어내리려는 공격들이 가해진다. 그 공격자들은 가해자들 앞에서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다. 이는 강약약강에 해당된다고 볼 수있다. 만만한 사람들에게는 막말을 쉽게 내뱉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상에서 (특히 젊은 세대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비하어 중 하나가 '찐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약자 멸시 및 비굴함이 학교폭력 문제를 피해자 비난으로 만드는 데 어떻게 기여하고 있느냐를 관찰할 수 있다.
한편 이 피해자 비난이란 개념이 악용되기도 한다. 2차 가해 문서에 나오는 것처럼, 피해자라고 자칭하는 자, 특히 무고자가 자신에 대한 반박과 비판을 피해자 비난이란 2차 가해라고 치부하고 반박을 봉쇄하는 것. 자세한 내용은 2차 가해 문서 참고.
2.1. 심리적 원인[편집]
피해자 비난이 대체 왜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해 그 원인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심리학계에서 줄곧 있어 왔다. 확인 가능한 가장 오래 된 과학적 연구 문헌은 1966년의 것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7], 둘씩 쌍으로 묶여서 과제를 수행해야 했던 참가자들은, 자기 실수 때문에 대신 괜히 전기충격을 받는 피해자를 보거나, 혹은 그 전기충격이 장기간 지속되는 피해자를 접했을 때 뜻밖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 피해자 파트너에게 미안해하고 그들을 안쓰러워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그들을 거부했으며 배척했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사회문제와 결합시킨 다른 논문에서는[8], 처녀나 아내 등 소위 '존중할 만한 여성'(respectable woman)이라면 강간을 당했을 때 가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이 있으므로 무거운 선고가 바람직하게 여겨지지만, 만일 이혼녀일 경우에는 가해자에게 책임을 덜 묻고 형량도 가볍게 선고한다고 하였다.
이런 특이한 심리의 원인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다. 사회적 인지(social cognition) 연구자들은 이를 후견편향(hindsight bias)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한 논문에 따르면[9] 참가자들의 절반에게는 어떤 여성이 밤에 술에 만취한 꽐라가 되어 헐벗은 옷차림으로 할렘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다가 당해버린다거나 등 특정 행동을 한 후 무난한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소개했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그 여성의 행동까지는 똑같은데 갑자기 강간 사건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러자 강간 결말 조건의 참가자들은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러게 그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후견편향이 나타났지만, 무난한 결말 조건의 참가자들은 (똑같은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내 그럴 줄 알았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후견편향은 피해자에 대한 비난의 경향을 직접적으로 예측했으며, 심지어 이들에게 "...사실 저쪽 집단에서는 이런 평범한 이야기를 봤다던데요?"라고 보여주더라도 이들은 "그래도 나는 강간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었다"고 초지일관으로 답변했다고.
이후 어떤 연구자들은 교도소에 수감된 성범죄자들 37명을 대상으로 심층면접을 실시하기도 했다.[10] 이 문헌에 따르면, 37명의 성범죄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비난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의 암묵적인 기본 전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전제들은 각각 ① '여성들은 불가사의하다'(Women are unknowable), ② '여성들은 성적 대상이다'(Women are sex objects), ③ '남성의 성욕은 통제 불능이다'(Male sex drives are uncontrollable), ④ '나는 내 욕구를 마땅히 충족시킬 권리가 있다'(Entitlement), 그리고 ⑤ '원래 세상이란 위험한 곳이다'(Dangerous world)로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기본 전제를 미리 깔아놓고 사건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나는 잘못한 게 없고, 잘못한 게 있다면 저쪽이다"라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개인차(individual difference)에 입각해서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인간관계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수행한 2011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11] 가상의 성희롱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남성 참가자들 중 유독 성차별 성향이 높게 나타난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 가해자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더 많이 느꼈으며, 자신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자기방어적(self-defensive)인 태도로 성희롱 사건의 원인을 찾으려 했고, 결과적으로 피해자를 비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가해자에게 공감이 되는 사람들은 자기도 찔리기 때문에 가해자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 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매사 성차별을 거의 하지 않는 평등한 의식을 지닌 남성들은 이런 비난에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점 역시 성립한다.
무엇보다도, 피해자 비난에 관련된 현대의 대개의 심리학적 연구들은 멜빈 러너(M.Lerner)가 주창한 공정한 세상 신념(Just-world hypothesis)이라는 이론적 조망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관련기사 공정한 세상 신념은 한국어의 '사필귀정' 이라는 표현과도 뜻이 상당 부분 통하는데, 이것은 "결국에는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세상의 순리이다"라고 굳게 믿는 신념을 의미한다. 즉,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강간이나 폭력 등의 피해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이 '뭘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사건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워지게 된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이 그런 불행한 일을 겪었다면, 이 세상은 더는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공정한' 곳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심리적으로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좀 더 나아가면, 결국 피해자 비난은 인식론적 위협에 대한 회피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아론 케이(A.C.Kay)와 같은 이론가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혼돈, 무선성(randomness), 무질서, 구조의 부재, 우연성, 불확실성은 매우 불쾌하며 혐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한다. 갑작스럽게 강간이나 린치 등을 겪게 되었을 때, 그것이 그저 "재수없게 당했다" 라고 설명된다면, 이를 지켜본 제3자들은 엄청난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한다. 자신 역시 언젠가 어느 순간에 똑같은 불행을 겪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간에 그 곳에 가면 안 돼, 그 행동을 하면 안 돼, 그 옷차림을 하면 안 돼"라는 식으로 어떻게든 그 '우연해 보이는' 현상을 예측 가능하고 예방 가능한 현상으로 바꾸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를 비난한다는 것은, 그 비난의 한편으로는 "...따라서 적어도 나라면 안전할 수 있겠지?"라는 불확실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12]
이런 특이한 심리의 원인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다. 사회적 인지(social cognition) 연구자들은 이를 후견편향(hindsight bias)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한 논문에 따르면[9] 참가자들의 절반에게는 어떤 여성이 밤에 술에 만취한 꽐라가 되어 헐벗은 옷차림으로 할렘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다가 당해버린다거나 등 특정 행동을 한 후 무난한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소개했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그 여성의 행동까지는 똑같은데 갑자기 강간 사건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러자 강간 결말 조건의 참가자들은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러게 그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후견편향이 나타났지만, 무난한 결말 조건의 참가자들은 (똑같은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내 그럴 줄 알았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후견편향은 피해자에 대한 비난의 경향을 직접적으로 예측했으며, 심지어 이들에게 "...사실 저쪽 집단에서는 이런 평범한 이야기를 봤다던데요?"라고 보여주더라도 이들은 "그래도 나는 강간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었다"고 초지일관으로 답변했다고.
이후 어떤 연구자들은 교도소에 수감된 성범죄자들 37명을 대상으로 심층면접을 실시하기도 했다.[10] 이 문헌에 따르면, 37명의 성범죄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비난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의 암묵적인 기본 전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전제들은 각각 ① '여성들은 불가사의하다'(Women are unknowable), ② '여성들은 성적 대상이다'(Women are sex objects), ③ '남성의 성욕은 통제 불능이다'(Male sex drives are uncontrollable), ④ '나는 내 욕구를 마땅히 충족시킬 권리가 있다'(Entitlement), 그리고 ⑤ '원래 세상이란 위험한 곳이다'(Dangerous world)로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기본 전제를 미리 깔아놓고 사건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나는 잘못한 게 없고, 잘못한 게 있다면 저쪽이다"라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개인차(individual difference)에 입각해서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인간관계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수행한 2011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11] 가상의 성희롱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남성 참가자들 중 유독 성차별 성향이 높게 나타난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 가해자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더 많이 느꼈으며, 자신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자기방어적(self-defensive)인 태도로 성희롱 사건의 원인을 찾으려 했고, 결과적으로 피해자를 비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가해자에게 공감이 되는 사람들은 자기도 찔리기 때문에 가해자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 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매사 성차별을 거의 하지 않는 평등한 의식을 지닌 남성들은 이런 비난에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점 역시 성립한다.
무엇보다도, 피해자 비난에 관련된 현대의 대개의 심리학적 연구들은 멜빈 러너(M.Lerner)가 주창한 공정한 세상 신념(Just-world hypothesis)이라는 이론적 조망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관련기사 공정한 세상 신념은 한국어의 '사필귀정' 이라는 표현과도 뜻이 상당 부분 통하는데, 이것은 "결국에는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세상의 순리이다"라고 굳게 믿는 신념을 의미한다. 즉,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강간이나 폭력 등의 피해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이 '뭘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사건을 겪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워지게 된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이 그런 불행한 일을 겪었다면, 이 세상은 더는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공정한' 곳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심리적으로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좀 더 나아가면, 결국 피해자 비난은 인식론적 위협에 대한 회피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아론 케이(A.C.Kay)와 같은 이론가들은 인간에게 있어서 혼돈, 무선성(randomness), 무질서, 구조의 부재, 우연성, 불확실성은 매우 불쾌하며 혐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한다. 갑작스럽게 강간이나 린치 등을 겪게 되었을 때, 그것이 그저 "재수없게 당했다" 라고 설명된다면, 이를 지켜본 제3자들은 엄청난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한다. 자신 역시 언젠가 어느 순간에 똑같은 불행을 겪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간에 그 곳에 가면 안 돼, 그 행동을 하면 안 돼, 그 옷차림을 하면 안 돼"라는 식으로 어떻게든 그 '우연해 보이는' 현상을 예측 가능하고 예방 가능한 현상으로 바꾸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를 비난한다는 것은, 그 비난의 한편으로는 "...따라서 적어도 나라면 안전할 수 있겠지?"라는 불확실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12]
2.2. 피해자다움[편집]
Victimness
피해자다움은 법학, 경찰행정학, 범죄학, 여성학 등의 분야들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받아 왔으며, 범죄 피해자가 갖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속성들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구성된다. 대중적인 표현으로는 "당신 같은 피해자는 처음 봤다"는 표현을 들 수 있으며, 심지어 국내의 한 논문에 따르면[13]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은 때때로 성폭력 피해자를 오히려 무고죄로 기소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예컨대 자신이 범죄를 당했다는 의식이 확고하면서, 그것이 자기 탓이 아니라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피해자는 고발 과정에서 당당하고 명석한 태도를 견지할 텐데, 이는 수사관들에게 무고의 죄질이 불량하다는 엉뚱한 인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사관들의 머릿속에 막연히 떠다니는 피해자다운 태도는 '울먹이고, 혼란스럽고, 말을 잇지 못하는' 인상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피해자답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이미 범죄정책 분야의 연구자인 닐스 크리스티(N.Christie)가 중요한 문헌을 남긴 바 있다.[14] 크리스티는 "피해자로서의 완전성과 적격성의 지위"(the complete and legitimate status of being a victim)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이상적 피해자(the ideal victim)라고 불렀다. 그리고 피해자가 이상적 이미지에 가까워질수록, 가해자 역시 이상적 이미지에 가까워진다고 하였다. 그의 문헌에서는 이상적 피해자의 다섯 가지 기준이 제시되는데, 이를 나무위키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피해자다움은 법학, 경찰행정학, 범죄학, 여성학 등의 분야들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받아 왔으며, 범죄 피해자가 갖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속성들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구성된다. 대중적인 표현으로는 "당신 같은 피해자는 처음 봤다"는 표현을 들 수 있으며, 심지어 국내의 한 논문에 따르면[13]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은 때때로 성폭력 피해자를 오히려 무고죄로 기소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예컨대 자신이 범죄를 당했다는 의식이 확고하면서, 그것이 자기 탓이 아니라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피해자는 고발 과정에서 당당하고 명석한 태도를 견지할 텐데, 이는 수사관들에게 무고의 죄질이 불량하다는 엉뚱한 인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사관들의 머릿속에 막연히 떠다니는 피해자다운 태도는 '울먹이고, 혼란스럽고, 말을 잇지 못하는' 인상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피해자답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이미 범죄정책 분야의 연구자인 닐스 크리스티(N.Christie)가 중요한 문헌을 남긴 바 있다.[14] 크리스티는 "피해자로서의 완전성과 적격성의 지위"(the complete and legitimate status of being a victim)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이상적 피해자(the ideal victim)라고 불렀다. 그리고 피해자가 이상적 이미지에 가까워질수록, 가해자 역시 이상적 이미지에 가까워진다고 하였다. 그의 문헌에서는 이상적 피해자의 다섯 가지 기준이 제시되는데, 이를 나무위키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2. 피해자는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다(The victim was carrying out a respectable project)
피해자가 피해를 겪던 당시에 여동생을 돌보고 있었거나, 노모의 병수발을 들고 있었거나, 어머니께 드릴 꽃을 들고 있었거나,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거나, 하여간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면, 그 피해자는 더 '피해자답다' 고 여겨진다. - 3. 피해자는 비난받지 않을 만한 곳에 있었다(The victim was where they could not possibly be blamed for being)
예컨대 피해자가 백주대낮에 갑자기 습격을 받았다거나 한다면, 그 피해자는 '피해자답다'는 인정을 받기가 쉽다. 이는 표현을 바꾸면 "피해자는 자기 스스로 범죄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로도 말할 수 있다. - 4. 가해자는 크고 악하다(The offender was big and bad)
가해자가 근육질이라거나 동종의 강력범죄 전과 이력이 있다면, 그 가해자에게 당한 피해자 역시 덩달아서 더 무고한 피해자로 존중 받을 수 있다. - 5. 가해자는 낯선 사람이며 피해자와 아무런 사적 관계가 없다(The offender was unknown and in no personal relationship to the victim)
즉, 가해자와 친밀한 관계일수록 가해자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지만, 피해자에게 원한을 사거나 개인 간의 시시콜콜한 역사가 아예 없었다면 그 피해자는 비로소 '피해자답다'고 여겨진다.
위의 다섯 가지 기준이 무서운 것은, 위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은 실제로 피해자인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피해자 지위를 일방적으로 부정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피해자가 이상적 피해자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입증하는 책임은, 크리스티에 따르면 피해자 본인에게 오롯이 지워지게 된다. 즉, 피해자 본인이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고, 얼마나 위험을 회피하려 애를 썼고, 가해자가 얼마나 강하고 무서웠으며, 자신과 가해자는 전혀 모르는 사이라는 것을 전부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 것은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만일 피해자가 자신이 이상적 피해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입을 열고 자신을 변호하고 사건을 공론화한다면, 이번에는 "드센 성격"이라는 인상을 주어서 거꾸로 1번 기준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라고. 결국 피해자에게 '가장 이상적인 피해자다움'이란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요구인 셈이다.
그런데 크리스티가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이상적인 가해자나 이상적인 피해자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강간 사건들이 늘 '풀숲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덮쳐드는 늑대'에 의해 '할머니의 병수발을 들기 위해 숲길을 홀로 걸어가던 빨간 모자'가 변을 당하는 시나리오를 따르지는 않는다. 강간뿐만 아니라 왕따나 학교폭력, 가정폭력, 기타 수많은 강력범죄들은 대개 그렇다. 가해자 역시 악한이라고 보기에는 의외로 평범할 뿐이다. 많은 경우는 타인을 해치려는 의도가 불명확하거나, 피해자와 안면이 이미 있었거나, 의외로 왜소한 체격이기도 하다. 여기에 쌍방폭행의 가능성까지 거론되기 시작하면 실로 설상가상이다.
크리스티에 따르면, 우리 사회가 파편화되고 개인들이 고립되어서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심이 약해질수록, 사람들은 자꾸 '이상적 이미지'에 의존하여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라본다고 한다. 범죄 피해자들이 뭐가 어쩌건 관심이 없는 무심한 사회일수록 그 피해자들이 마치 '순진무구하고 힘 없는 불쌍한 모습'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크리스티는 이상적 이미지를 털어내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이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만큼 가까워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해야만 현실이 복잡하다는 것을 느끼고 정형화된 머릿속 피해자상에 현실의 피해자들을 끼워맞추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2.3. 내면화된 차별[편집]
범죄를 당하거나 차별을 경험하거나 갑질을 당한 피해자들이 스스로 당해도 싸다고 여기거나 자신들이 틀렸다고 자학하며 자신과 같은 부류의 피해자들을 비난하거나 매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