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문제는 치외법권 영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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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 조회 964회 작성일 22-08-31 15:46본문
1970년 대법원 "부부 사이는 정교 청구권 있으므로…"
〈사례 1〉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30대 중반의 남자가 법정에 서 있다. 죄명은 강간.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아내를 겁탈한 죄다. 그는 다른 여자와 동거를 하다가 아내에게 발각됐다. 아내는 남편을 간통죄로 고소한 후 이혼소송을 제기한 상황. 다급해진 남편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그 와중에 아내를 폭력으로 제압해 간음한 사건이었다. 1심과 2심에서 이미 유죄로 판가름났기에 대법원 판결만 남아 있었다.
재판장은 '사건'이 있기 직전에 두 사람이 새 출발하기로 합의한 후 아내가 간통죄 고소를 취소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사건의 결론. "(두 사람이 부부인데도 남남인 것처럼) 피고인에게 정교 청구권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강간으로 처벌한 것은 그릇된 판단이다. 원판결을 파기하고 2심으로 돌려보낸다." 사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얼굴엔 슬쩍 미소가 비친 듯싶었다. 마치 '그럼 그렇지, 부부 사이에 강간이 어딨어?' 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너무 놀라지는 말라. 1970년에 일어난 일이다. 이때만 해도 대법원은 결혼을 '정교(情交) 승낙'이나 '정교권 포기 의사표시'와 유사어로 봤다. 대법원은 두 사람 사이에 협박이나 폭행을 통해 강제로 간음이 이루어졌는지는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부부 관계가 깨졌다면 몰라도 유지되고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는 논리, 마치 함께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 사이에는 강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 법원만 그랬겠는가. 그때의 사회 분위기가 딱 그랬다.
부부 폭행은 용납될 수 없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가정 폭력 사건으로 처리하거나 형법으로 처벌한다. 그렇다면 부부간 강간은 어떻게 될까. 난감한 문제이긴 하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형법 297조 강간죄 조항이다. 형법을 포함해 법전 어디에도 부부 사이 강간죄 성립을 부정하는 근거는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부부간의 성폭행을 애써 외면해 왔다. 결혼하면 부부가 함께 성생활을 하는 것이니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은밀한 문제는 당사자끼리 알아서 해결하라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과연 부부간의 잠자리에 법이 개입할 필요가 없을까. '부부강간', 그 불편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법원은 실질적인 부부 사이에는 강간죄 적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폭행·협박 등에 대해서만 우회적으로 처벌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법조계 주류의 시각도 부부강간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논리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여러분의 생각과 비교해 보라.
"부부 사이는 동거의무1) 가 있고, 동거의무에는 성적 교섭 의무가 포함된다. 어디까지를 강간으로 볼 건지 모호하고, 입증도 곤란하다. 부부간 사생활에 섣불리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다. 게다가 아내가 이혼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악용할 소지도 있다. 이런 특성을 감안한다면 부부강간은 부정되거나 최소한 처벌해서는 안 된다."
2004년 서울중앙지법 "부부간 성폭행도 처벌 대상"
그런데 2004년, 부부간 성폭행을 단죄한 판결이 처음 등장한다. 서울중앙지법은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성적 학대하고 폭행한 남편에 대해 강제추행죄2) 를 적용, 처벌했다. "부부간 성폭행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처벌 대상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판결이었다. 하지만 적용 법 조항이 강간이 아니라 강제추행이었고, 남편이 항소를 포기하는 바람에 1심에서 사건이 끝났다는 한계가 있었다.
5년 후인 2009년, 드디어 부부강간을 인정하는 최초의 판결이 나온다. 부산지법은 기존의 부부강간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사건은 이렇다.
〈사례 2〉
부산에 사는 A씨(남, 40대)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20살 연하의 외국인 아내 B씨와 결혼했다. B씨는 생활비를 주지 않는 데다 폭행을 일삼는 남편 A씨를 피해 결혼 넉 달 만에 가출해 공장을 전전했다. 하지만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린 B씨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간 두 사람은 평온하게 지내는가 싶더니 생리중이라는 이유로 B씨가 성관계를 거부하자 A씨는 폭발했다. 그는 B씨를 흉기로 위협하면서 기어이 간음했다.
A씨는 특수강간 혐의로 기소됐는데 범죄 사실은 모두 인정했다. 이제 법률적인 판단만 남아 있었다. 재판부는 장문의 판결을 통해 결론에 접근한다. 판결에는 ▲부부강간의 인정 여부와 근거뿐 아니라 ▲강간을 인정할 부부의 범위 ▲부부강간에서 협박과 폭행의 정도와 같은 쟁점들이 담겨 있었다.
법원은 "부부의 성(性)은 상호간 이해와 협력, 사랑과 존중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또한 부부간 성폭행을 방치하면 피해자는 성의 도구나 노예로 전락했다는 인식으로 후유증을 겪을 수 있고, 자녀에까지 피해가 확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여기까지는 도덕적 판단에 가깝다.
부산지법, 2009년 '부부강간 인정' 최초 판결
법원은 부부간 성적 교섭 의무는 당연히 인정된다고 봤다. 하지만 "(결혼을 했다고 해서) 처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포기하거나 권리가 상실된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는 결혼으로 일단 유보한 것일 뿐 매번 개별적으로 행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의 성관계 요구에 아내가 거절한다면 거기서 멈추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잠자리 갈등의 해소 방법은?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시도"는 용납될 수 없고 "대화와 설득을 통한 해법"이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이혼 법정으로 가라, 이것이 법원이 제시한 해결책이다. 물론 실효성에 의문을 품을 수 있겠으나 부부 사이라도 성적 자유 침해는 안 된다고 못 박은 셈이다.
법원은 사생활 침해 우려에 대해서도 "부부 문제는 치외법권의 영역에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이어 "부부강간에 국가가 개입해 혼인 관계가 파탄 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강간 자체로 이미 파탄된 것이며, 국가는 부부간 성적 폭력 사태를 사후 수습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덧붙였다.
부산지법이 판결을 통해 밝힌 결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강간죄에서 처를 제외할 아무런 근거가 없고 현행법으로도 그렇다. 강간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기결정권은 처에게도 당연히 있다. 따라서 이미 깨진 부부뿐 아니라 정상 부부 사이에서도 강간이 인정되어야 한다. 강간의 수단인 폭행과 협박도 일반 강간과 같은 수준이면 족하다. 가정 폭력을 처벌하면서 훨씬 죄질이 중한 강간을 방치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며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헌법과 정의 관념에도 어긋난다."
법원은 부부강간이 처에 의해 남용될 가능성이나 입증 곤란의 문제에 대해서는 수사나 재판 등 사법절차에서 해결할 문제이지 부부강간을 부정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또한 "부부강간은 면책된다는 과거의 그릇된 생각은 문명 시대에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구시대의 관념"이라며 그동안의 판례를 에둘러 비판했다.
미국이 1984년 뉴욕 주 항소법원의 판결로 부부강간을 인정한 것을 비롯해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도 90년대 들어 부부강간이 인정되는 추세이다. 부산지법도 "국제결혼이 행해지는 이 시대에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법 원리에 입각한 정의의 실현이 요청된다"며 기존 판례와 다르게 새로운 해석을 내린 배경을 밝혔다.
"혼인증명서가 면책특권을 갖고 아내를 강간하는 자격증일 수 없다. 기혼 여성도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권리를 지닌다." (1984년 미국 뉴욕 주 항소법원 People v. Liberta 판결)
이런 논리로 부부강간을 최초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부산지법의 판결은 그 자체로 큰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1심 판결이라는 약점 또한 있었다. 하급심은 대법원 판결에 얽매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려면 대법원의 판결이 필요했다. A씨는 항소를 제기했으나 안타깝게도 얼마 뒤 사망해 항소심 사건은 공소기각3) 으로 종결됐다. 대법원의 입장을 확인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래도 세상이 변해감에 따라 법원에서도 부부강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009년 2월 대법원은 또 다른 부부강간 사건 판결을 선고한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었고 또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